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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만대루 [안동]

큰산happypapa 2011. 3. 18. 17:29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400년 한결같은 모습
늠름도 하여라

저는 본래 그래픽 디자이너였습니다.
1993년 세계 정상의 디자이너 54명에게 수여하는
‘디자인 앰배서더’ 칭호를 한국 최초로 받았습니다.
다음해 디자인 비엔날레에 초대되어 파리에 가서 펜화를 만났습니다.
박물관에서 많은 건축문화재 펜화를 보며
‘한국 건축문화재를 펜화에 담아 세계에 알리자’는 결심을 하고
나이 오십에 전업을 했습니다.

동양에서 수천 년간 붓으로 글과 그림을 그릴 때
유럽에서는 펜으로 글을 쓰고 기록화를 그렸습니다.
펜화는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사진제판 기술이 발달하면서 기록화를 그리는 화가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드문 기록화를 그리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한국 건축가들이 좋아하는 건물로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대루(晩對樓)를 손꼽습니다.
강변에 병풍같이 둘러선 병산과 만대루의 어울림에 누구나 반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좌우에 지은 동재와 서재에 가려 제 모습을 볼 수 없기에 과감하게 밀어냈습니다.
서원 앞에 심은 은행나무와 전나무를 삭제하고 소나무를 배치하여
옛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진으로 불가능한 새로운 기능의 기록화로 재탄생 한 것입니다.

병산서원은 풍산읍내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 류성룡 선생이 병산으로 옮겨지은 것입니다.
만대루를 그리면서 기와의 단일 색상이 몹시 눈에 거슬렸습니다.
건물은 4백 살이 넘은 할아버지인데 지붕은 10살짜리 어린이인 꼴입니다.
단가마에서 구운 재래식 기와의 자연스런 모습으로 고쳐 그렸습니다.
우리도 일본처럼 재래식 기와로 문화재의 참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펜화의 바탕이 된 사진입니다.
그림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보세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동재와 서재를 좌우로 밀어서 만대루의 제 모습을 그렸습니다.
여러분은 국내 최초로 온전한 만대루를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홍매화와 청매화도 앞으로 당겨 그려서 만대루를 살렸구요,
감격하셨으면 박수 좀 쳐 주세요.



병풍 같다고 해서 병산(屛山)



병산서원은 전학후묘(앞에 교육시설이 있고 뒤에 사당이 배치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례문 뒤 가로로 긴 건물이 만대루입니다.



만대루 밑으로 올라가면 서원 마당이 나옵니다.
입교당에 붙인 병산서원 현판이 보이지요.
이 사진은 2005년 1월에 찍은 것입니다.
병산서원 오리지날 현판은 안동 국학연구원으로 가고 현재에는
짝퉁이 대신하고 있으며
만대루 현판도 복제품을 만드는 중이라 현재는 볼 수 없습니다.



정면 건물이 입교당, 오른쪽이 동재(東齋), 왼쪽이 서재(西齋) 입니다.
이번 취재 때 찍은 병산서원 현판은 모조품입니다.


동재에는 학생 중에 선배들의 방이며
서재는 후배들의 방입니다.
왜냐하면 입교당에서 보면 동재는 왼쪽이고 서재는 오른쪽이거든요.
유학에서 왼쪽을 높게 쳐주는 원칙이 있어서 입니다.
그래서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서열이 높습니다.
현재에도 대통령 왼쪽에 서열 높은 장관이 배치됩니다.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서야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아니 남자가 여자보다 높다는 이유가 뭡니까?”
“낸들 압니까. 공자에게 물어 보슈”



서재



입교당 마루 뒤쪽에 판문을 달았습니다.
여름에 모두 열어 놓으면 시원한 바람에 공부하기 좋았겠지요.
일반 가정에서는 이렇게 많은 판문을 달지 않습니다.



명성재는 원장님 방입니다.
입교당 마루 왼쪽 방이거든요.



경의재는 선생님들 방입니다.
원장 보다는 낮은 지위이니 물론 오른쪽 이지요.



전학후묘 윈칙에 따라 입교당 뒤에
사당인 존덕사(尊德祀- 사진 오른쪽 건물)를 두었습니다.
왼쪽은 장판각입니다.



존덕사 입구의 삼문



존덕사 삼문의 뒷모습.
문 뒤에 보관한 것은 제를 지낼 때 마당에 까는 멍석을 말아 놓은 것입니다.



존덕사.
사당에는 절처럼 단청을 칠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일반 가옥에 단청을 하면 큰일 납니다.
궁과 관아, 절 같이 높은 분이 계시는 곳에만 단청을 할 수 있습니다.



사당인 존덕사 내부
정면(왼쪽) 위패가 ‘영의정 문충공 서애 류선생’ 위패이고
오른쪽은 서애의 아들 류진의 위패로 ‘증 이조참판 수암 유공’이라 써 있습니다.



장판각(藏板閣)은 서원에서 출간한 책을 찍던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입니다.
목판은 모두 국학진흥원과 하회 영모각에 옮겨갔습니다.



전사청(典祀廳)은
주사에서 만든 제수를 잠시 보관하는 곳입니다.
왼쪽 방은 마루방으로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며
가운데 방은 온돌방으로 음식을 지키는 분이 묵는 곳이고
왼쪽은 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는 곳입니다.



전사청의 일각문과 서원의 후원



전사청에서 일각문을 보고 그린 펜화
1999년 작품으로 무척 펜 선이 성글지요.
하루에 두 장을 그렸으니
3주에 한 장을 그리는 요즈음 그림과 사뭇 다르지요.

“이정도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래도 참아주세요.
저도 먹고 살아야지요 ㅋㅋㅋ



입교당 마루에서 본 동재 서재와 만대루, 병산



1999년 5월에 그린 만대루



만대루 누하주(마루 아래 기둥)
굽은 자연목을 그대로 쓴 모습을 보세요.



만대루 우물마루와 천정의 대들보를 보세요.
휘어진 들보들이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보의 역할만 할 수 있다면 굽은 들 어떠하며 휘어진들 어떻겠습니까.
인공의 흔적이 적을수록 보는 사람의 마음이 편합니다.
한국 장인들이 마음이 잘 들어나 보이는 현장입니다.
우리 고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만대루 대들보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한말씀 하시면
“저 친구 한옥에 대해 뭘 좀 아네.” 하고 한수 접어준답니다.



만대루 마루에서 본 병산과 강, 모래사장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떠나기 싫은 곳입니다.



예전에 많았던 노송을 6.25전쟁 통에 많이 베어내고,
늘고 병들어 죽어서 이제는 몇 그루 남지 않았습니다.
젊은 소나무라도 심어서 훗날을 기약해야 되겠습니다.



병산서원의 살림을 맡은 하인들이 살던 곳으로 주사(廚舍)라고 합니다.
‘ㅁ’자 건물입니다. '고직사'라고도 합니다.
관리를 하시는 류시석님에게 차대접을 받은 곳입니다.



복례문 안 왼쪽에 있는 작은 연못으로 ‘광영지’라고 합니다.



복례문 안 오른쪽에 있는 화장실로 문이 없습니다.
밖에 있는 ‘하인뒷간’의 반대말로 ‘양반뒷간’이라고도 합니다.
지금도 사용 합니다.
“문도 없는데 여자는 어떻게 하느냐”는 분은 밖에 있는 공중변소를 사용하세요.



주사 건물 앞에 예쁜 야외 화장실이 있습니다.
돌담을 달팽이처럼 둥글게 쌓아서 문이 없는데도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통시’라고 하는데 ‘하인뒷간’이라는 분도 있습니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하지요?”
“그냥 맞으세요”



통시 내부가 궁금하시지요?
식사중인 분은 보지 마세요.



류성룡 선생의 후손으로 관리를 맡은 류시석님.
정성으로 관리를 하셔서 어느 문화재보다 깔끔합니다.
만대루에 올라가 보면 발에 먼지 하나 묻지를 않습니다.
매일 걸레로 닦거든요
6년 만에 뵈었다고 무척 반가워하십니다.
차대접도 받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