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字[펌] _ 四柱, 業
인생행로
우리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면서 같이 부처님공부를 하는 불자들이지만 각자의 처해있는 환경과 운명은 모두가 다르다.
젊을 때는 자기의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만사가 자기의 뜻대로 될 줄 알지만, 인생을 살아보면 보이지 않는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윤회를 통한 과거생의 업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같이할 배우자의 선택도 자기의 내면에 입력되어있는 과거생의 업력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보면 사랑에 도취되어 있던 기간은 짧고 오랜 기간을 인내하고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결혼이란 것을 쉽게 표현하면, 인도의 성인 ‘선다싱’의 얘기와 같은 것이다.
인도의 성자 선다싱이 어떤 나그네와 같이 히말라야산을 지나가던 중에 엄청난 눈보라를 만나게 되었다.겨우 앞을 보며 힘겹게 가는데 눈보라 속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선다싱은 그 사람을 업고 가자고 했으나 동행한 나그네는 ‘내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고 하며 혼자 가버렸다.
선다싱은 의식을 잃은 그 사람을 등에 업고 눈보라를 헤치며 천신만고 끝에 마을까지 왔다.
그러나 자기만 생각하고 혼자 살겠다고 먼저 가버린 나그네는 추위에 체온이 너무 떨어져 중간지점에서 얼어 죽은 시체로 변해 있었다.
반면 선다싱은 등에 무거운 사람을 짊어졌기 때문에 몸에서 열을 만들어 두 사람의 체온이 몸을 따뜻하게 해서 그 사람도 깨어나고 두 사람이 함께 얼어 죽지 않고 살아 날 수 있었던 것이다.
결혼생활도 이와 같은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함께 힘겹게 걸어가야 하지만 결국 그것이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후손을 생산하며 인간의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역사의 되풀이처럼 인생도 되풀이 되는 것이다.
혼자 이다가 결혼하여 부부라는 짝이 되어 자식을 낳아 가족을 이루고, 자식들이 성장하여 출가를 하고 다시 두 사람이 지내다가 부부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이승을 떠나면 또다시 혼자인 것이 인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불교에 귀의한 햇수는 오래되었지만 그야말로 무늬만 불자였지 불교의 깊은 진리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가 병고를 겪으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불교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공부가 공양간 천정에 붙어서 스피커를 통해 스님들의 법문을 들은 파리의 수준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생(生)이라는 것은 허공에 한 조각의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고, 사(死)라는 것은 그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출근을 했으면 퇴근을 해야 하듯이 이 세상에 왔던 사람은 때가 되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도 있다. 이것은 수명의 장단(長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일생동안 한 인생의 애절한 사연과 슬픔과 기쁨 그리고 가슴 벅찬 환호도 한 순간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불교공부를 해보면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고 완성을 향해 윤회하는 인간의 발길에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리지어 가고 있는 인생행로란 대열에 휩쓸려 함께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재물에 집착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도 마음이 인색하여 남을 위하여 베풀지 못하고 여행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어떤 부자가 모처럼 가족을 동반하고 해외여행길에 올랐다가 항공기사고로 시신조차 없이 사라지고 난 후에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가 남긴 재산을 놓고 연고권을 주장하는 재판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식을 여러 명 두고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단칸 셋방에서 혼자 살다가 죽은 후에 발견된 사람도 있다.
인간사는 참으로 묘하다.
미워하면서도 같이 살아야 하는 끈질긴 인연이 있는가 하면,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만하는 애석하고 짧은 인연도 있는 것이다.
어떤 여인은 처녀시절에 연애하던 사람이 술을 너무 좋아해서 결혼은 다른 사람과 했는데 결혼을 하고나니 남편이 또 술꾼이 되어 버려서 일생동안 남편의 술 때문에 고생한 사연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처녀시절에 연애했던 술꾼은 술을 끊고 착실한 가장이 되어 있었고, 지금의 남편은 자기와 결혼할 당시에는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이 자기와 결혼을 하고는 세월이 가면서 술을 좋아하게 되었고 40대가 되면서 부터는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으로 변했다고 한다.
술이 취하면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서 추태를 부리고 속을 썩여서 견디다 못해 몇 번이나 이혼을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술이 깨고 나면 나무랄 것이 없는 인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교회에도 나가보고 병원에서 금주처방도 받아 보았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생활 20년이 되어갈 무렵의 어느 날 단체로 관광을 가서 어느 큰 절에 들렸는데 그 절의 마당을 산책하시던 노스님 한분이 “보살은 술냄새가 나니 법당에 들어가지 마라”고 하셔서 “저는 술이라면 몸서리가 나는 사람이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인데 왜 술냄새가 납니까?”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스님이 잡고 있던 주장자로 옆구리를 푹 밀어서 넘어질 뻔하고 창피를 당한 것 같아서 불쾌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그날 밤 꿈에 자기가 어느 주막의 술장사가 되어 길가는 남자들을 불러들여 술을 팔고 있었으며 심지어 과거(科擧)보러 가는 선비의 지필보자기를 빼앗아가며 주막으로 끌어들여 술을 먹이며 뭇 남성들을 취객으로 만들고 자기도 만취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너무도 끔직한 자신의 모습에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고, 옆에는 그날도 만취가 된 남편이 헛소리를 하며 녹아 떨어져 자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이나 혼자 울고 나서 남편이 술을 먹는 것이 순전히 내 탓이구나! 하고 전생업보에 대한 반성을 하며 그날부터 날마다 새벽이면 가까운 절에 가서 새벽예불에 참석하고 참회의 기도를 하며 정식으로 불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부터는 남편이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보이고 전과같이 만취가 되어 들어와도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고 이것이 모두 자기의 업보라는 것을 알고 참회하며 마음을 고쳐먹으니 그때부터 남편이 술을 멀리하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 여자의 잠재의식에 과거의 업력이 그대로 각인되어 있어서 남자들만 보면 술을 먹이고 싶었기 때문에 업장이 소멸되기 전에는 그 영적파장이 그대로 남편의 뇌파에 동조했던 것이다.
불교공부를 해보면 모든 것이 남의 탓이 아니고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인간은 육신의 소멸로 인한 당대의 삶이 끝이 아니고 영적기운이 아뢰야식에 각인되어 윤회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백년도 잠깐이고 생명은 물질계와 정신계가 만나서 일으킨 불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번갯불처럼 반짝하고 사라지는 허망한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길께 느끼고 있을 뿐이다.
전하(電荷)를 가진 구름들이 다시 만나면 번개는 언제라도 재생되듯이 자아(말나식)란 생명의 불꽃으로 나타나고, 영혼(아뢰야식)은 번개를 일으키는 구름 속의 전하들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 인연에 따라서 생명의 불씨가 되는 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혼은 인연에 따라 시공간에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말나식이라는 자기에의 집착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2012. 3. 2. 상락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렇게 금강카페라는 반야용선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과거생의 인연의 고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