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차이[퍼온글]
생각의 차이[퍼온글]
신문을 보니(조선일보 3.30) “교황과 혁명가의 만남”이라고 하며 1면에 큰 사진이 올려 져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과 만나 두 손을 맞잡고 마주보고 있는 사진이다.
사진 설명에는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30분 동안 종교, 과학,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카스트로가 “교황은 무슨 일을 하느냐?” 고 묻자, 베네딕토 16세는 해외순방과 미사 집전 등에 대해 설명했다’고 한다.
다른 독자들의 눈에는 이 장면이 어떻게 비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생각이 다른 백발의 두 연로(年老)하신 어른들이 인생황혼이 되어 마음을 비우고 인자한 모습으로 지난날을 돌아보며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우리는 삶이라는 같은 무게의 짐을 지고가면서도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내가 가고 있는 이길 만 길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길로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싸우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지만 인생황혼을 맞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지난날을 돌아보니, ‘세상의 꽃이 한가지일 수 없듯이 모두가 다 아름다운 꽃인데도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꽃만 꽃인 줄 알고 다른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내온 것이 송구스럽다’고 하며 손을 마주잡고 서로에게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인다.
경봉큰스님께서는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휘호를 써주시며 세상을 하나의 꽃으로 보라고 하셨다.
세상은 서로 다른 꽃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꽃동산을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며 분별하고 시비하지 말고 모두가 아름다운 꽃으로 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세상은 서로 다른 것이 모여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도 자기 것만 주장하며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마치 적이나 원수처럼 여기고 투쟁을 일삼고 있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고 대립과 분열을 일삼아 오고 있는 중생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한 말씀이셨다.
1961년 러시아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우주여행인 대기권을 벗어나 지구궤도를 돌며 “우주공간 어디에도 신은 보이지 않고 지구는 푸른빛 이다.” 고 했다.
그런데 1998년 미국의 우주선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두 번째 우주여행을 한 77세의 노장 존 글렌 상원의원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했다.
같은 우주여행을 하고서도 이렇게 상반된 생각을 한다.
이처럼 동일상황에서도 각자의 시각이 다른 것이다.
한사람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기독교인은 경이로운 현상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는 연기연멸(緣起緣滅)의 법칙에 따라, 성서에서 말하는 창세기 때가 아니고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별들이 생겨나고 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 안에서도 육신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세포들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으며 삼라만상은 만고의 진리인 연기연멸(緣起緣滅)이라는 불변의 법칙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 어느 특정한 절대자의 의도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공간 어디에도 별도로 신이 존재하는 곳은 없다. 신의 능력이라고 하는 영적인 기운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보느냐? 가 문제인 것이다.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토마스의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한 114항목이 있는데 그 중의 한 구절은 이렇다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이다. 만일 너희들을 이끄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한다면, 새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갈 것이다. 만일 그들이 바다 속에 있다고 말한다면, 물고기가 너희들보다 하느님 나라에 먼저 갈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속에 있다. 동시에 너희들 밖에 있다.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안다면 너희들은 아버지인 하느님의 아들이 너희들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면 너희들은 가난한 나라 안에 있고 가난함이란 너희들 자신일 것이다.”
하느님은 너희들 속에 있는 동시에 밖에 있다는 말은 불교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의 표현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서나 불교의 경전은 그 당시의 상황에 따라 가르친 것을 제자들이 편집한 것이다.
불경은 하나도 가감 없이 있었던 그대로 옮겨 놓다보니 부처님이 말씀하시기 위해 자리에 앉는 동작하나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그 자리에 참석한 대중들의 면모도 자세히 기록했는가 하면, 성경은 후대의 교단을 운영하던 실세들의 영향으로 선별적인 편집이 이루어졌고 책임편집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있다. 요한,마태,마가,누가 등 .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는 현재의 성경에 포함되지는 못한 외경이 더 있다는 것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교단의 논쟁은 여전하고 실세들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부처님과 예수님이 전하고자 했던 본뜻은 사랑과 자비로 같은 것이다.
그런데 후대로 전해오면서 전도방법의 차이로 인해서 다른 길로 가버린 것이다.
자세한 얘기는 기회가 되면 다음에 더 다루기로 할 예정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전하고자 했던 사랑과 자비는 희생과 봉사이며 이해와 용서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의 명분으로 취하고자 하는 애욕(愛慾)이 아니다.
서로가 사랑을 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서로에게 너무 집착하고 간섭하므로 해서 기를 꺽어 놓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꺽어
너의 곁에 두려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시인 서정윤의 ‘사랑한다는 것으로‘ 라는 시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 서로에게 너무 집착하고 창공을 높이 날아야할 새의 날개를 꺽어 옆에 두고 자기의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하다가 어느 날 싫증이 나면 그때부터는 또 불화가 일어나고 서로가 상처받기 시작한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고 집착이다.
그래서 법구경 호희품(好喜品)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하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걱정이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또한 걱정이다.’ 라고 했다.
우리는 불교공부를 하면서도 애욕과 집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너와 나의 구별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에게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이지 소유나 집착이 아닌 것이다.
또한 몸에 병이 났을 때도 우리는 가장먼저 병원을 찾지만, 외부의 병원을 찾기 전에 내 안에 있는 의사에게 먼저 문의 해 봐야 하는 것이다.
사실 병원의사의 처방이나 약은 보조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치유의 힘은 우주에 가득한 생기와 함께 내 안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진정한 나의 주치의를 만나야 하고 그를 통해 내 몸에 있는 면역력을 가동해야 하는 것이다.
있는 줄도 모르고 방치하고 외면했던 내 안에 있는 진짜 나의 주치의를 만나서 그동안 몰라 뵙던 점을 화해하고 마음의 명약을 처방받고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 면역력을 발동시키는 방법이 바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행복은,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고 불행해서 되돌아볼 때에만 보이는 것’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이 행복인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발생하면 그때서야 지나간 일상을 되돌아보며 그때를 그리워하며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의 모습들이다.
육신의 병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신의 병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환자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옷이 더럽거나 구겨지면 세탁을 하거나 다림질을 하듯이 속진(俗塵)에 오염된 우리의 몸과 마음도 제대로 된 불교공부를 통해 깨끗이 씻고 새롭게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추진하고 있던 일이나 사업에 실패를 했거나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 아니면 또 다른 인간관계로 고뇌하거나, 혹은 몸에 큰 병이 왔을 경우에도 실망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불교공부를 제대로만 하면, 내 안에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무궁한 에너지를 통해서 건강은 물론, 인간관계를 비롯한, 무엇이던지 손상되어 있던 것을 다시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도도히 흘러가고 있는 강물에 어떤 사람이 오줌 한번 갈겼다고 오줌물이 되지 않는다.
조금 구겨졌다고 만 원이 천원 되지 않는다.
조금도 기죽지 말고 가슴을 활짝 펴고 내 안에 있는 부처님을 만나자!
금강카페라는 반야용선이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상처 난 가슴과 세파에 시달리면서 오염된 속진(俗塵)을 씻어내고 내 안에 있는 부처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최상의 공부터이고 수행처인 것이다.
금강카페의 주식과 간식을 꾸준히 대하다 보면 어느 날 행복한 모습으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금강카페의 정진회에 처음 참석해 보고 좋아서 많은 불자들께 소개하고 싶어서 ‘와서 보니 좋거든’ 이란 명제로 써온 글이 오늘로서 벌써 33회째인 것이다.
금강카페의 기본공부가 주식이라면 ‘와서 보니 좋거든’ 은 우리의 일상을 주제로 한 그야말로 생활불교를 통한 다양한 재료로 차려지는 간식이라고 여기면 된다.
3회째 ‘행복의 조건’부터 차례대로 읽어오면, 인생사를 통해 불교를 배우고 또한 조금씩 업그레이드 하면서 불교의 교리가 과학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부처님말씀을 통해 깨닫고 실천하며 숙세의 업장을 소멸하게 되고 진정한 행복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현실은 내가 불러온 자업자득인 것이다.
그것이 설령 무거운 짐이라고 해도 그것은 반드시 내가 저야 하는 짐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무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짐을 왜 지고 있는지도 모르거나 남 때문에 억지로 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벼운 짐도 천근만근의 무게가 되어 무거워 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다.
알고 보면 모든 것은 당연하고 가슴 아파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중병이 와도 억매이지 말고 병이라는 자체도 잊어버리고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집착으로 닫혀있던 무궁한 에너지와 면역력의 창고가 열리고 새로운 용기와 기운이 솟아난다.
가슴을 활짝열고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놓아버리자!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2012. 4. 1. 상락화
쉬운 일도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고 힘들지만, 어떤 고난이 와도 이것은 내가 겪고 가야하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여기면 반드시 극복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니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자.
출처 : http://cafe.daum.net/vajra/2ZNd/887 와서 보니 좋거든(33)-생각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