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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불교 _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큰산happypapa 2012. 5. 16. 10:38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산중불교

중앙일보 20120516_33

 

조선 중기 문신 차천로(車天輅)는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稿)』에서 고려 수도 개성(開城)에만 300여 곳 이상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목은 이색(李穡)이 공민왕 원년(1352) 올린 상소문에서 ‘불가의 사찰과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이 서로 얽히고 섞여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고려시대 불교는 산사(山寺)가 아니라 시사(市寺), 곧 시가(市街)의 종교였다.

 고려 문종 10년(1056) 개성 근처 덕수현(德水縣)에 지은 흥왕사(興王寺)는 무려 2800간이었다. 심지어 흥왕사를 짓기 위해 덕수현을 양천(楊川)현으로 옮겼는데, 시중(侍中) 이자연(李子淵)이 “이 때문에 백성들이 집을 짓고 지붕을 잇느라 편안히 지낼 사이가 없고 남자는 지고 여자는 들고 가는 것이 길 위에 서로 잇대 있습니다(『고려사』 ‘식화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공민왕이 재위 12년(1363) 흥왕사에 행차했다가 김용(金鏞)에게 암살당할 뻔한 ‘흥왕사의 변’은 고려 불교와 권력의 얽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도전(鄭道傳)은 살해당하기 석 달 전인 태조 7년(1398) 5월경 불교 비판서인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했다. 정도전은 보우(普愚)의 비문을 저술하고 여러 승려들과도 교류할 정도로 승려들과 가까웠으니 그의 비판의 핵심은 권력화된 고려 불교의 폐단에 있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불교를 공격한 데는 불가의 막대한 재산 문제도 있었다. 태종 5년(1405) 금산사 주지와 진주 와룡사 주지의 절 여종 간통 사건이 발생하자 의정부는 개경과 서울에는 오교·양종(五敎兩宗) 중 각 1사(寺)씩만 허용하고 지방 각 도와 부(府)에도 선종과 교종 각 1사씩만 허용했다. 군현에서는 선교와 교종 중에서 1사만 허용하고 나머지 모든 사찰의 막대한 토지와 노비는 국가에 귀속시켰다(『태종실록』 5년 11월 21일). 조선에서 억불책(抑佛策)을 시행한 이유 중의 하나가 사찰 재산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사례다.

 이렇게 유학에 쫓긴 불교는 시가에서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조선 후기 승려들은 칠반(七般), 또는 팔반(八般)천인으로 분류되어 도성에 출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시가에서 쫓겨 산중불교가 된 결과 불교는 물질문명의 폐해가 극대화된 현대 사회에서 영성의 목소리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조계종 지도급 승려들의 호텔 도박 사건에 대한 시중의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쇠퇴기에 접어든 원인도 권력과 돈에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그간 불교가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친 모든 사건의 원인은 돈이었다. 산중불교의 공(空)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런 사건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713/8191713.html?ctg=2002&cloc=joongang%7Chome%7Copinion